월터 란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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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미국 뉴욕 주 출신의 애니메이터, 만화가, 애니메이션 감독, 프로듀서.
2. 생애[편집]
이탈리아 이민자 부모의 가정에서 태어난 란츠는, 1915년에 영화 감독 그레고리 라 카바(Gregory La Caba)가 관리 중이던 애니메이션 부서에서 일하면서 애니메이터로써의 업계 경력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1925년엔 Dinky Doodle이란 자신의 카툰 시리즈를 만들어 감독, 애니메이션, 주연까지 맡기도 했다.
1928년 유니버설에서 찰스 민츠가 제작자로 참여해 제작 중이던 오스왈드 더 럭키 래빗 카툰 시리즈에서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고용되었고, 당시의 유니버설 사장 칼 르밀이 민츠가 만들던 작품의 퀄리티를 보고 불만을 지녀 찰스를 해고한 대신 오스왈드를 계속 제작하기로 정했는데 이때 란츠는 톰 팔머(Tom Palmer), 버트 피스크(Burt Fiske)를 포함한 스튜디오의 애니메이터들을 인수받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란츠는 개발 협력자로 애니메이터 빌 놀란을 선택하였었고, 1934년에 공동 작업을 멈추기 전까지 서로 같이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홀로 스튜디오의 제작자가 된 란츠는 유니버설이 배급한 단편 애니메이션들을 제작해 주게 되었으며, 1930년대 중기부터 새 캐릭터들을 주연으로 한 작품들을 제작하던 중에 앤디 판다(Andy Panda)가 1939년부터 란츠의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첫 스타 캐릭터로 명성을 올려갔고 그 이듬해엔 란츠 본인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우디 우드페커(딱따구리 우디)가 등장하는 작품을 처음으로 데뷔시키게 된다.
란츠가 운영하던 스튜디오와 유니버설 간의 관계는 큰 일 없이 조화로웠지만, 1947년 새로 부임한 소유자의 영향으로 유니버설-인터내셔널(Universal-International)로 개명된 유니버설 측의 새로운 경영진이 전체적인 구조조정을 하면서 란츠가 제작한 캐릭터의 라이선스와 상품화 권리의 소유를 주장하자, 란츠는 이 요구를 거절했으며 1948년부터 이듬해 초까지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배급으로 개봉한 12개의 단편 카툰을 제작했었다. 그러나 재정적 문제로 인해 같은 해(1949년)에 스튜디오를 폐쇄하였으며, 1951년 유니버설과 란츠는 서로 계약을 갱신하고 카툰 제작을 재개하였다.
1957년 우디 우드페커 쇼에서 애니메이션 작업 과정을 기록하는 시퀀스에 출연하기도 했던 란츠는, 1960년대까지 다른 영화사들이 애니메이션 부서를 폐쇄하고 카툰 제작을 중단하는 와중에도 극장용 단편 애니를 만드는 스튜디오에서 애니메이션 프로듀서이자 제작자의 위치에 있었다.[1] 그러나 1960년대 후반 발생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수익이 줄게 되면서 점차 관련 작품 제작에 불리한 상황에 놓이자, 1972년에 란츠는 자신의 스튜디오(월터 란츠 스튜디오)를 폐쇄하고 스튜디오가 제작한 자산의 판권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와 90년대엔 NSFI의 자문위원회에서 자문 위원으로 소속되어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1993년에는 자신의 명의로 애니메이터들을 위한 장학금과 상금을 만들어 칼아츠에 기증하기도 했다. 이듬해(1994년) 3월 22일, 심부전의 여파로 인해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성 조셉 메디컬 센터에서 세상을 떠났다.
3. 작품 목록[편집]
- Woody Woodpecker
- 오스왈드 래빗
- 앤디 판다
- 칠리 윌리
4. 여담[편집]
-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황금기 시절 애니메이터들한테 일을 하기 가장 좋은 고용주 중 1명으로 여겨졌었다. 이유는 란츠 자신이 애니메이션 만들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었으며, 실제로 애니메이터와 애니메이션 감독을 거친 경력도 있던 것이 애니메이션 제작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스튜디오의 작업실에서 일하는 애니메이터와 아티스트들의 재능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보조해 줬기 때문에 알렉스 루비(Alex Lovy), 샤머스 컬헤인(Shamus Calhane)을 비롯한 휘하 애니메이터들이 훗날 인터뷰에서 란츠를 언급할 때 그를 고평가하기도 했다.
- 유니버설에서 배정받은 애니메이션 제작 예산이 많지는 않았지만, 스튜디오 내부 직원들과의 지속적인 소통이 크게 작용했는지 란츠가 이끌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는 집단적인 파업이 일어나지 않은 스튜디오 중 한 곳이었었다.[2]
- 1941년 개봉된 단편 애니메이션 Scrub me mama with a boogie beat이 1948년 재개봉하였을 당시, NAACP 측에서 유니버설 측에 항의하는 사태가 빚어졌었는데 결과적으로 이듬해 초에 상영이 중지되었지만 이 작품의 제작자였던 란츠한텐 굉장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란츠는 누군가의 기분을 상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고 연이어 말했으며, 이후부터 스튜디오에서 제작하는 작품들에 다른 인종에 대해 차별적인 묘사를 삽입하지 않으려 적극적인 노력을 했었고 다시는 이러한 작품들은 만들지 않게 된다.[3]
- 1980년대 초기에 진행한 필름 인터뷰 영상이 있다. 영상 자료
- 스탠리 큐브릭이 란츠의 작품들 중 딱따구리 애니를 굉장히 좋아해서 자신이 제작할 영화에 삽입하려고 란츠와 상의를 했지만 그(란츠)가 거부하면서 이뤄지지 못했다.
5. 관련 인물[편집]
- 영향을 받은 인물
- 윈저 매케이(Winsor Mccay): 윈저가 제작한 애니메이션 공룡 거티에 깊은 영향을 받았었다고 애니메이션 역사가 조 아담슨(Joe Adamson)이 저술한 (월터 란츠를 바탕으로 만든) 전기의 인터뷰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 동료
-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제작자로써 당시 유일한 위치로써의 친구이자 파트너쉽을 유지했다.
- 빌 놀런(Bill Nolan): 활동 초중기에 란츠가 가장 신뢰하던 애니메이터이자 애니메이션 감독.
- 추종자
- 전 동료
- 멜 블랭크: 초대 딱따구리를 맡은 성우였지만 워너 브라더스와의 전속 계약 체결로 얼마 안 지나 유니버설을 떠났으며, 1950년대 초반에 타이틀 카드에 대한 딱따구리 음성 활용에 대한 권리 문제로 민사소송을 진행한 사건이 있었다.
- 상사
- 칼 르밀(Carl Lemile)
- 찰스 민츠(Charles Mintz)
- 기용한 애니메이터, 연출가
- 알렉스 루비
- 텍스 에이버리: 1930년대 초반과 1950년대 중반에 잠시 란츠의 휘하에서 일했다.
- 딕 런디(Dick Lundy)
- 폴 J. 스미스(Paul J. Smitch)
- 제임스 샤머스 컬헤인(사머스 컬헤인)
- 벤 하더웨이(Ben Hardaway): 우디 우드페커를 디자인한 캐릭터 디자이너이자 딱따구리의 1944~45년 성우.
- 애머리 호킨스(Emery Hawkins)
- 돈 패터슨(Don Patterson)
- 레이 패터슨(Ray Patterson)
- 그랜트 시몬스(Grant Simmons)
- 그림 냇윅(Grim Natwick): 플라이셔 스튜디오에서 베티 붑 제작에 참여한 애니메이터.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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